진한 여운 남긴 '스트릿 우먼 파이터'…기획의도, 왜 이렇게까지 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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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경선
출판/발간일
2021/10/31
출판사/출처
경향신문
요약
별점
유형
신문 기사
“전체적으로 댄스신 분위기가 되게 업돼있는 상태예요. 너무 감사하고, 너무 좋습니다.”(허니제이) “인생의 터닝포인트”(모니카)
원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고달프다. 그런데 지난 26일 종영한 엠넷(Mnet)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 참가자들은 피말리는 서바이벌을 거치고도 제작진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수차례 전했다. ‘댄서들을 조역에서 주역으로 만들겠다’는 프로그램의 기획의도가 제대로 통한 덕분이다. 초반만 해도 ‘또 서바이벌물이냐’는 피로어린 반응이 많았지만 곧 수많은 시청자가 ‘스우파 과몰입’ 증상을 호소했다. 참가한 여덟 크루는 팬덤을 끌어모았고, 전국 투어 콘서트는 1분 만에 매진됐다. <스우파>의 기획의도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통할 수 있었을까.
댄서들의 실력과 프로페셔널리즘, 경쟁을 초월한 우애, 댄스 퍼포먼스의 예술성과 메시지, 참가자들의 성장 스토리, 프로그램을 연출한 최정남 PD의 ‘춤을 향한 뚝심’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흥행 요소들이 맞아떨어지며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춤의 제전’으로 막을 내렸다.

“춤이라는 스포츠를 하는 선수들”…명장면 여럿 탄생

<스우파>에 참가한 크루들은 프로 중 프로였다. 이미 각종 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석에 앉았던 댄서들이 다수다. 실력이 쟁쟁한 댄서들이 배틀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최고 댄서들이 ‘파이트 존’에서 숨을 헐떡이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으로 시청자들은 진한 울림을 느꼈다.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가 ‘계급 미션’에서 잠을 자지 않고 안무를 만드는 모습도 방송을 탔다. 권영찬 책임프로듀서(CP)는 지난 29일 기자회견에서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멋진 그림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우는 모습을 보고 K댄스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엠넷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참가한 여덟 크루의 리더. 좌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모니카, 허니제이, 아이키, 리헤이, 리정, 노제, 가비, 효진초이. 엠넷 제공
패배에 깔끔하게 승복하는 모습도 초반부터 큰 호응을 유도했다. 최정남 PD는 “댄서들이 승부욕을 가지고 미션에 임해주셨고,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고 (상대를) ‘리스펙’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다”며 “춤이라는 스포츠를 하는 스포츠 선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덕분에 명장면들이 여럿 탄생했다. 허니제이와 코카엔버터의 리더 리헤이는 함께 활동하다가 갈라섰던 과거를 배틀을 통해 화해시켰다. 라치카의 피넛이 프라우드먼의 립제이와 왁킹 댄스로 맞붙은 배틀에 댄서들은 신발을 던져 경의를 표하는 스트리트 문화를 보여줬다. 파이널 진출권을 놓고 겨룬 라치카와 YGX의 사활을 건 배틀에서도 <스우파>의 정신이 보였다.

퀴어 향한 지지와 여성선언문 무대 올라

댄서들이 <스우파>에서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준 예술성과 메시지도 값졌다. 여러 명이 합을 맞춰 춤을 추는 ‘메가 크루’ 미션 때부터 예술성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25명부터 최대 43명이 한꺼번에 무대에 섰다. 최 PD는 이 미션이 욕심을 낸 미션이라며 “화면에 잘 담아내려 노력했다”고 했다.
엠넷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세미파이널 ‘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 크루 라치카의 퍼포먼스 장면. ‘세상의 모든 별종’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엠넷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세미파이널 ‘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 크루 프라우드먼의 퍼포먼스 장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을 위한 응원의 메시지 ‘여성 선언문’을 안무로 표현했다.
이들이 몸으로 표현한 메시지는 ‘맨 오브 우먼’ 미션부터 피어나기 시작했다. 라치카는 “하이힐은 내 페르소나”라며 ‘힐댄스’를 추는 가수 조권, 댄스크루 커밍아웃과 함께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본 디스 웨이)’에 맞춰 무대를 꾸몄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다’는 노래인데, 라치카는 “세상의 모든 별종이라고 불리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만든 퍼포먼스”라며 “꼭 선보이고 싶던 무대”라고 했다.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색색의 의상이 무대를 채우며 ‘퀴어들의 당당함’이란 메시지가 드러났다. 정규방송에서 소수자의 정체성과 퀴어함을 정면에서 지지한 보기 드문 사례였다.
같은 미션에서 프라우드먼은 드랙 아티스트 캼을 무대로 불렀다. 캼은 춤을 추는 대신 질 스콧의 노래 ‘Womanifesto(여성 선언문)’을 읊었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비판하는 내레이션이 담긴 곡이다. 성별 전형성을 없앤 의상을 입고 “나는 엉덩이가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뇌와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가진 강한 여성”이라는 가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파이널에서 우승한 홀리뱅은 마지막 ‘컬러 오브 크루’ 미션곡으로 여성 래퍼 리틀 심즈의 ‘베놈’을 골랐다. “그들은 나에게 난소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최고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여성이 힘을 갖는 것이 싫어 인정해야 할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가사가 있다.
엠넷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파이널 ‘컬러 오브 크루’ 미션에서 크루 홀리뱅의 퍼포먼스 장면.

‘춤에 진심’인 PD의 뚝심 통해

최 PD는 <댄싱9> <힛 더 스테이지> <썸바디> 등 춤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연출한 바 있다. <스우파>를 통해서는 걸스힙합, 크럼프, 왁킹 등 ‘스트리트 댄스’를 무대 위로 가져왔고, 댄서들에게 팬덤을 선물하겠다는 뚝심을 보였다. 그는 “댄서들의 ‘직캠’이 나오고, 조회수가 상당한 숫자를 기록하는 걸 보며 (뿌듯했다)”고 했다.
엠넷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연출·제작한 최정남PD(왼쪽)와 권영찬CP(오른쪽)/Mnet
춤을 향한 최 PD의 진심이 댄서들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상징적 장면들이 파이널 무대에서 연출됐다. 가수 씨엘(CL), 선미, 청하, 사이먼도미닉·로꼬가 각각 코카엔버터, 훅, 라치카, 홀리뱅에게 파이널 경연곡을 선물했다. 댄서들이 춤을 추는 동안 이 아티스트들은 무대 옆에 비켜서서 노래를 불렀다. 댄서들만 빛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권 CP는 “아티스트가 아닌 댄서들이 주인공이 되게 하기 위한 고민을 많이 했다”며 “파이널 퍼포먼스 음원은 음악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댄서들에게 음원 수익의 일부를 가져가게 하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고 했다.
덕분에 <스우파>에 출연한 댄서들은 이제 행복하다. 라치카의 리더 가비는 “무대에서 가수를 빛내기 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댄서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허니제이는 “과거에는 여성 댄서라고 하면 쇼적인 부분, 볼거리 같은 가벼운 뉘앙스가 있었다”며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 댄서들의 리더십, 열정, 의리, 우정을 보여주면서 ‘예쁘다’ ‘섹시하다’보다 ‘멋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다”고 했다.
/ 유경선 기자